구례 벚꽃길, 봄날의 고요한 산책
벚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자꾸 밖으로 향한다. 괜히 핸드폰 사진첩을 넘겨보다가, 몇 년 전 구례에서 찍은 벚꽃 사진을 다시 보게 됐다. 그 길이 참 좋았었다. 다른 벚꽃 명소들처럼 요란하지 않고, 조용히 피어나는 봄이 그대로 담긴 곳이었다.
구례 벚꽃길은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다.
문척면에서 산동면까지, 차로 달려도 15분 남짓한 거리지만, 걸으면 한참 걸린다. 하지만 그 길을 걷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벚꽃나무들이 도로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고, 강물이 옆에서 조용히 흐른다. 꽃이 만개하면 길 전체가 연분홍빛으로 물든다. 바람이 불면 꽃잎이 흩날리고, 마치 눈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하늘이 흔들린다.
이 길의 매력은 ‘차분함’이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축제장은 아니고, 그래서 더 좋다. 벚꽃 구경을 하기 위해 굳이 떠들썩한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구례에서 처음 알았다. 동네 주민들은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여행자들은 사진 몇 장 찍은 뒤에는 벤치에 앉아 한참을 강물만 바라본다.
벚꽃길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 작은 쉼터가 나온다.
쉼터마다 안내판이 하나씩 있는데, 거기 적힌 짧은 문장들이 뜻밖에 마음을 붙잡는다. “잠시 멈춰 꽃을 보세요.” 그런 문장들. 시끄러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초대는 없을 것이다.
벚꽃길을 따라 산책한 후에는 산동면 산수유 마을로 향했다. 3월 중순이면 산수유꽃이 마을 전체를 노랗게 물들인다. 구례는 벚꽃과 산수유가 함께 피는 봄 풍경이 아주 특별하다. 같은 시기에 다른 색의 꽃이 번갈아 시선을 끈다. 차를 타고 몇 분만 이동하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봄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화엄사. 꽃길만 걸은 날에 어울리는 고요한 절. 사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오래된 나무 사이를 걸으며 마음을 씻었다. 절 깊숙한 곳에 핀 매화나무도 봤다. 어떤 꽃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지만, 어떤 꽃은 그냥 그 자리에 피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 귀하게 느껴진다.
구례 여행을 마무리할 땐 지리산 온천랜드에 들렀다. 하루종일 걸었던 다리를 따뜻한 물에 담그고 나니, 몸이 금세 풀렸다. 물소리와 벚꽃, 따뜻한 햇살. 딱히 뭔가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하루였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사진첩을 들여다보니, 그때 찍은 벚꽃 사진은 그다지 멋지지 않다. 구름이 많았고, 핸드폰 카메라도 오래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진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그 순간이 정말 조용하고, 따뜻했기 때문이다.
올해도 구례 벚꽃길에 다시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또 그 길을 걷게 될 것 같다.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아래,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해도 충분한 길. 그런 길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